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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용씨와 고려재조대장경
  • 글쓴이 용석구
  • 작성일 2012-12-16 14:20:50
  • 조회수 4232
홍천용씨와 고려재조대장경 용석구 2012-11-26 14:09:37
홍천용씨와 고려재조대장경                        카페: 홍천용씨가족사랑방 닉네임(청현거사 )
                                                                                                               2012.08.22. 14:24

홍천용씨는 시조이신 득의 공으로부터 비로서 가계가 시작되어진다. 그러나 흔히 타성 족보에서 나타나는 득성(得姓)유래와 선조에 대한 내력이 빈약하고, 정확한 생몰연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일부 성씨보감이나 홍천용씨 관련 내용에서도 홍천 용씨의 유래를 상고시대 부족사회에서 힘이 센 동물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말을 하나, 고증되지 않는 이러한 내용은 상당한 오류가 있다라고 필자는 본다.

한국의 거의 모든 성씨의 유래가 중국이라고 단정할수는 없지만, 역사적으로나 각 성씨요람과 족보를 살펴볼때 과히 지나친 견해는 아니라고 본다.

조선씨족통보사에서 홍천용씨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을 보면 중국의 董氏(동씨)성을 쓰는자가 있는데, 평소에 용(龍)을 흠모하여 성을 용씨로 삼았다고 하며, 이후로 그 자손들이 용씨로 사용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董氏는 한무제때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동중서를 시조로 하며, 본관은 선조의 관향인 중국 廣川(광천)이다.

또다른 문헌에는 용씨는 중국의 요계열, 고양전욱씨 계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몇년전에 지인이 중국여행길에 우연히 용씨 성을 가진 중국 현지인을 만났는데 한국에도 용씨가 살고 있다라고 하자, 그 사람들(한국사람)은 모두 우리 집안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하며 아주 반갑게 생각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중국대륙에서 용씨 일족들이 용씨의 족보역사(중국에서 고려로 나간 선조의 역사)를 알고 있다라는 생각에 고무되지 않을수 없었다.

고려가 외국인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포용하고 개방되어진 사회에서 시조 득의공의 선조(先祖)가 어떤 신분과 연유를 가지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 고려에 유입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전혀 알길이 없으며, 고려귀하성씨등 참고문헌을 검토해봐도 용씨의 귀화내용에 대한 기록이 없어 고증할수가 없는 상황이다.

중국 송나라가 거란의 빈번한 침략에 전전긍긍한 상황에서 고려가 3차례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고려는 동북아시아에서 위상이 달라졌고, 거란에게 막대한 양의 물품을 조공으로 바치는 송나라는 고려와 동맹을 원했다.

형식적으로 거란과 사대관계를 가졌지만, 그들은 고려와 다투기를 꺼려했고, 특히 많은 여진족들이 고려로 귀부하고, 고려는 귀부한 여진족에게 책봉을 하기도 했다. 이때 귀화한 여진족계통을 시조로 한, 성씨가 발생되어진 시기이다.

송나라는 여러차례 사신을 고려로 보내 대 거란전쟁에 나서 줄것을 요청하고, 많은 물품과 송나라 관료 인물들이 함께 들어 오게된다. 이때에 홍천용씨의 시조 선대분들이 고려에 유입되는 첫 배경이 아닌가 라고 유추해 본다. 따라서 홍천용씨가 고려귀화인의 기록에는 나타나있지 않지만, 기록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송나라가 고려와의 동맹과 거란으로 부터 침략을 면하기 위해 송나라 조정에서 고려로 보낸 사신과 관료들이 장기간 고려에 상주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고려인으로 편입되어 토착화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역설하건데 ,삼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 이전부터 있어 왔던 토속성씨나 귀족성씨가 아니라고 단정할수 있는것은 그 시대의 문헌상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성씨라는 점에서 확실성을 더해주며. 기원전 1세기 무렵에 형성된 부여국(퉁구스계통)이 346년에 연나라에 의해 망하고 고구려에 편입되어졌으나. 여기에도 용씨의 기원은 나와 있지 않다.

이로 미루어 볼때 홍천용씨가 최초로 뿌리를 내리는 시기는 고려 초중엽 무렵이었으리라고 추측이 가능하며, 시조공께서 불현듯 용씨의 시조로 나타나 문하시중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고려로 귀화해 정착한 몇대의 선조로 부터 내려오면서 가문의 형성이 이루어 졌고, 이 같은 터전을 바탕으로 혼란스러웠던 고려정국에서 정승을 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된다.

시조공께서 1208년 고려 희종 4년에 시어사를 지내고 1241년 고려고종 28년에 문하시중을 지내셨다고 족보에는 전하나, 고려사,고려사절요등의 관련 역사자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그리고 고려대장경 재조각판사업을 총지휘했다고 족보상에는 전하나 대장도감이나 기타 관찬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다. 현재 고려대장경에 대한 논쟁이 있다. 첫째, 대장경이 국가사업으로 무신정권이던 최씨집안의 최충의, 최이 가 주도했다는 주장과 둘째, 담양국씨의 국영돈이 대장경 성판도감에서 15년간 감독했다고 하는 주장,담양국씨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관찬기록에는 없다. 관련 학계에서는 대장경각판의 대역사를 최씨집안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주장을 하고 있다. 고려 고종24년(1237년) 재조대장경도감을 설치하고 다시 만드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때, 이규보가 국왕을 대신하여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을 작성하나 여기에도 관련 기록은 없다.

각판을 강화도 대장도감과 남해의 분사도감에서 분산해서 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찌됐던 족보기록으로 볼때 시조득의공과 담양국씨의 족보에 기록된 국영돈등이 각자 분산해서 대장경 판각사업에 깊이 관여했으리라 본다.

재조대장경각판 조성사업이 15년만에 이루어진것으로 볼때, 엄청난 인원이 동원되어졌을 것이고, 국력이 집중되는 대역사인점을 고려할때, 어느 한 사람이 총지휘하기에는 너무나 과중한 일이 아니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는 몇사람이 책임을(지휘감독) 나누어서 했을 것으로 보며, 장장15년간 각판이 완성되기까지 한 사람이 계속하여 지휘감독 했다는 것은 대단히 무리한 해석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내용과 같이 최씨집안의 최이, 최충의(최씨문중족보에 기록되었는지 확인하지 못함). 홍천용씨의 용득의. 담양국씨의 국영돈등이 지휘감독했다고 기록된 족보상의(개인史草의 의미) 무게를 두고 싶을 뿐이다.

아울러 아족(我族)인 홍천용씨의 정확한 유래와 시조공께서 감독한 고려재조대장경에 대한 연구가 절실한 상황이지만, 현재까지 여러 자료에서는 고증할수 있는 문헌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청현거사 (淸賢居士)가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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